2009년 03월 12일
젊은 창극 <로미오와 줄리엣>
처음 내가 창극을 보러 간다고 했을 때 친구들의 반응은 다들 ‘그걸 왜 보냐?’였지. 그래, 나 같아도 그랬을 거야. 아무리 한국적이라는 게 세계적인 것이라는 둥, 전통 문화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둥 해도 재미가 없는 걸 어떡해. 듣기만 해도 졸음과 고통이 밀려오는데 굳이 그걸 스스로 찾아서 느낄 필요는 없는 거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어. 창극 앞에 ‘젊은’ 이라는 말이 붙고 작품명이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니, 대체 이놈의 정체가 뭔가 궁금해지더라고. 그래서 국립극장을 찾았지. 결과는? 오, 생각보다 굿인데!

비교하는 재미, 그러나 비교할 수 없는 재미
일단 창극이 무엇인지부터 정확히 알아보자. 판소리가 뭔지는 다들 알지? 북치는 사람 한 명과 노래하는 사람 한 명이 나와서 노래와 함께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잖아.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적벽가, 수궁가 모두 판소리를 통해 전해오는 이야기이고. 그런데 창극은 판소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각각의 배역을 맡기고 이것을 무대화한 작품을 뜻해. 쉽게 말해 판소리 음악극, 한국식 뮤지컬이랄까? 창(소리)도 있지만, 일반 연극처럼 그냥 대사를 말하는 부분도 있어서 낯설지 않은 느낌이야. 무대 오른쪽 모니터에서 자막이 제공되니 내용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 않고. 위에는 한글 자막이, 아래에는 영어자막이 셰익스피어의 원작 그대로 나오는데, “Such a Sweet Sorrow”와 같은 유명한 표현과 판소리에서만 쓰이는 말투가 함께 등장하는 게 흥미롭더라구.
원작이 원체 유명하다보니 작품을 보며 자연스럽게 비교를 하게 되는데, 어떻게 탈바꿈 했나 살펴보는 것도 나름 쏠쏠한 재미야. 먼저 이 작품의 배경은 고려시대 전라도 남원과 경상도 함양이 맞닿아 있는 팔량치 고개. 중세 이탈리아의 베로나가 아니지. 주인공도 몬테규 가(家)의 로미오와 캐퓰릿 가(家)의 줄리엣이 아니라 남원 토호 최불립 집안의 딸 최주리와 함양의 귀족 문태규의 아들 문로묘로 바뀌었어. 주리와 로묘, 유치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럴 듯한 면도 있지? 이 두 집안의 대비가 경상도 사투리와 전라도 사투리로 더욱 확실해지는 건 ‘한국화’한 창극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이 아닐까 해. 둘이 처음 만나게 되는 것도 가면무도회가 아닌 최불립이 마련한 재수굿판에서인데, 우아한 왈츠 대신 신명나는 놀이 한마당이 펼쳐지는 게 아주 흥겹더라구. 또 둘의 사랑을 이어주는 역할로는 원작의 로렌스 신부 대신 구룡폭포 근처의 무당 구룡댁이 등장해.
하지만 이 작품이 원작의 번안 수준에만 머무르는 것은 절대 아니야. 창극이 시작된 지 얼마 안 가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은 자연스럽게 잊어버리게 되지. 하나의 독립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개성 있고 맛깔 나는 부분이 많으니까. 일단 의상! 색색깔의 비단옷이 눈 앞에 펼쳐지는데, 와, 난 그게 그렇게 아름다운 줄 미처 몰랐어. 퓨전 사극에서나 보던 옷들을 직접 가까이서 확인하니, 무대가 울긋불긋한 게 시각적으로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더라구. 대사도 신선했어. 판소리에 나오는 말이 지금 쓰는 말과는 많이 다른 형태라서 알아듣기 힘들까봐 걱정했는데 오히려 그 나름이 맛이 있달까? 줄리엣이 로미오에게 반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궁금해 하며 “그 사람 기혼자면 내일 우리 집에서 송장 나가”라고 하거든. ‘꼬리가 길면 잡힌다’라는 뜻의 말도 “방귀가 잦으면 똥 싼다고, 조심해야지요.”라고 하는데 어찌나 재밌던지. 아, 그리고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만큼 은근히 야한 대사도 많다는 거, 크크!
그러나 무엇보다 제일 매력적인 건 바로 ‘창’이 아닐까 . 듣는 내내 ‘이런 게 바로 한국적 Soul이 아닐까’ 생각했어. 서양의 클래식 음악에서 듣는 곱고 예쁜 목소리는 아니지만, 사랑의 감정과 고통의 상태를 표현할 때 우리의 창만큼 극렬함을 잘 드러내는 것이 있을까 싶더라고. 무언가 토해내는 듯한 노래, 그 끓어오르는 느낌이 절절한 마음속에 나를 풍덩 빠뜨리는 것 같아. 이런 건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우리만의 보물이 아닐까해.
사실 이 ‘젊은 창극’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해. 관객들에게 창극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려고 2005년부터 새로운 레퍼토리를 개발해왔다고 하더라구. ‘로미오와 줄리엣’같은 해외 작품을 창극화한 건 처음인데, 어려운 시도였겠지만 아주 의미 있는 결과가 탄생했다고 봐. 난 어서 빨리 외국인들이 이 작품을 봤으면 좋겠어!
# by | 2009/03/12 09:31 | performance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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